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   

마리아 프리돌린데 MARIA FRIEDOLINDE 수녀          ND 4286              PDF Download

헤드빅 아우프엠 오르데 Hedwig AUF‘M ORDE

독일, 코스펠드 여왕이신 마리아 관구

출 생: 1921년 10월 24일 훼히타, 홀도르프
서 원: 1952년 8월 12일 알렌
사 망: 2018년 12월 25일 코스펠드, 안넨탈 수녀원
장 례: 2018년 12월 28일 코스펠드, 수녀원 묘지

“오늘 다윗의 도성에서 너희에게 구세주가 났다.” – 그날의 전례에서
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는 네명의 자녀 중 맏이였다. 부모의 농장에서 동생들(남동생 둘과 여동생 한 명)과 함께 성장했다.

홀도르프의 기본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8년의 학업을 마친 뒤에는 농장에서 양친을 도왔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는 훼히타 근처의 마리엔하인에서 여자 농업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노틀담 수녀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부모의 농장에서 일했다. 헤드빅은 이 시기에 수도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느꼈다. 그래서 저 라인지역 뮬하우젠의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를 청했다. 수도 양성 후, 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는 수녀회의 다양한 분원에서 주로 살림분야의 사도직을 행했다. 전후 시기에는 공동체의 재정적 수단이 한정되어 있어 수녀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는 투신과 부지런한 노동과 창의성으로 공동체의 물질적 상황이 나아지는데 기여했다.

1973년에서 2013년까지는 알렌에서 살고 일했다. 첫 5년간은 살루스에서 사도직을 수행했다. 수녀는 큰 기쁨과 사랑으로 병든 동료 수녀들을 돌보았으며 그들의 복지에 최우선적 관심을 두었다. 그 다음에는 성 미카엘 상업 학교(현재 직업 학교)의 관리인이 되었다. 수녀는 16년간 이 광범위한 소임에 임했다. 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는 매우 헌신적이었고 전체적으로 보는 눈과 장기적 안목과 함께 조직력을 갖춘이였다. 수녀는 동료들, 직원들과 학생들과 다정하고 따뜻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수녀의 조언이나 실질적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이곳 안넨탈 수녀원을 찾은 엄청난 수의 방문객을 보면 사람들이 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를 얼마나 감사로이 여겼는지 알 수 있다.

학교에서의 사도직에서 은퇴한 다음에는 수녀원의 일을 도왔다. 수녀는 좋은 요리사였으며 정원과 과수원에서도 일했다. 정원의 꽃으로 아픈 이웃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녀의 특별한 기쁨이었다.

2013년, 92세가 되자, 수녀는 안넨탈로 와서 여생을 상당히 독립적으로 보냈다. 동료 수녀는 수녀를 사랑으로 동반해 주었다.

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는 평생을 가족과 가까이 지냈다. 친지들에게도 자신을 열어 놓았다. 이는 또한 특별한 상황에서도 명확했다. 수녀는 병든 남동생이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사랑으로 함께 했고 그 이후에는 올케를 돌봐주었다.

수녀의 죽음이 임박하자 수녀와 특별한 관계였던 조카는 곁에 머물러 주었다.
이제는 마리아 프리돌린데 수녀가 하느님 안에서 마지막 성취를 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