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샬리네 수녀  

메리 샬리네 Mary Shalinee 수녀            ND 5263                  PDF Download

세실리아 폰세카 Cecilia Fonseca

파트나, 성모 승천 관구

출 생:            1937년 8월 9일               웨스트 벵갈, 하우라
서 원:            1958년 12월 8일             비하르, 자말푸르
사 망:            2022년 1월 18일             파트나, 관구 본원
장 례:            2022년 1월 20일             파트나, 관구 본원
매 장:            2022년 1월 20일             파트나, 관구 본원 묘지

세실리아 폰세카는 암브로즈 안토니 폰세카와 리타 메리 디수자의 다섯 자녀 중 네 째였다. 형제 세 명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세실리아는 하우라의 “복된 여행의 성모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콜카타에서 십자가의 딸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녀 아녜스 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계속되는 기관지염 때문에 부모님은 세실리아를 비 가톨릭 힐 고등학교에 보낼 수 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시니어 캐임브리지 고등학교를 마쳤다. 대학교 이전 과정을 위해 파트나 여자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철도청에서 은퇴하면서 가족들은 자말푸르로 이사했는데 세실리아가 노틀담 수녀들을 접하게 된 것이 이곳에서였다. 세실리아는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틀담 수녀님들과 다시 만나고 보니 수녀가 되고자 하는 이전의 갈망이 되살아났다.”

세실리아는 1956년 6월 15일 자말푸르에 위치한 노틀담 수녀원으로 입회했다. 1956년 12월 15일에 착복했으며 성녀 데레사를 주보 성인으로 하여 메리 샬리네 수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녀는 네 명의 동료 수녀들과 함께 서원했다.

수녀는 노틀담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미국 클리블랜드로 파견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클리블랜드의 존 캐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수녀는 1965년에 인도로 돌아왔다. 첫 사도직은 파트나의 노틀담 아카데미였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는 방갈로르의 소피아 고등학교에서 교사이자 분원 책임자로 일했다. 다음 사도직은 U.P 판트나가르의 캠퍼스 학교였으며 2년간 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했다. 마지막 교직 소임은 파트나의 노틀담 아카데미였다. 파트나에 있었던 메리 샬리네 수녀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흥미로운 사회학과 교사이자 매우 배려심이 있는 사람으로 수녀를 기억했다. 많은 학생들이 수 년간 수녀와 연락을 유지했다.

1984년, 수술을 받은 다음부터 관구 본원 공동체 식구가 되어 시간제로 사목 사도직에 관여했다.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찾아가고 파탈리푸트라 구역과 쿠리이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수녀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궁핍한 이들을 돌보았다. 메리 샬리네 수녀의 손과 마음은 선물을 받고 이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열려있었다. 2013년, 수녀는 파트나의 우다얀 병원에서 위중한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놀랍도록 회복을 잘했고 사목 사도직을 계속해갔다. 완전히 방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지난 6개월 동안만이었다. 2021년 10월 29일, 수녀는 쿠리이 성가정 병원에 입원하여 산소 보조기를 달았다. 퇴원하여 수녀원 살루스에서 말기 환자 완화치료를 받았다. 12월 13일, 수녀의 상태가 심각해지면서 성가정 병원에 재입원했다. 몇 주, 몇 달 내내 지속되는 고통에 대한 메리 샬리네 수녀의 인내심은 감탄스러웠다.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다. 수녀의 대응은 언제나 미소와 “감사”였다. 수녀는 2022년 1월 18일 오후 3시 45분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장례 미사는 총대리인 제임스 죠지 신부와 다른 세 명의 신부가 집전했다. 코로나의 제한으로 미사 참례 인원을 제한해야 했다. 본원 묘지의 매장식은 미사 직후였다. 메리 샬리네 수녀가 하늘에서 사목 사도직을 이어가며 하느님의 어좌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를.